민족반역자와 친일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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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금까지 민족반역자를 친일파라는 말로 희석시켜 부르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것은 민족반역자라는 말보다는 친일파로 부르는 것이 민족을 반역한 삶을 희석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애국운동을 한 사람들을 독립운동가라고 부른다면 이에 반하는 삶을 살았던 사람들은 민족반역자로 불러야 할 것이다. 이런 민족반역자라는 주장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는 말이기도 하다.
말 그대로 “‘민족반역자’ 또는 ‘부왜반역자’라는 불도장 찍히는 것과 ‘친일파’ 또는 ‘친일문인’ 소리를 듣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 저마다 생각해 보면 될 것이다.”라고 김성동 작가는 말하고 있다. 좋은 게 좋다고 우리는 인정을 담아 잘못된 것을 숨겨주고 가려주고 살아왔던 민족이다. 그러나 나라의 주권을 통째로 빼앗겼던 일제강점기 36년은 5천 년 역사에서 가장 뼈아픈 역사의 상처다. 임진왜란 6년의 시절도 국권은 빼앗기지 않았고, 중국 등 외세의 모진 간섭에도 나라의 주권을 잃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런데 국가의 주권을 통째로 일본에 넘겨주고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살았던 사람들을 민족반역자라 부르지 않고 친일파라는 희석된 말로 부른다면 그것은 주권을 또 빼앗기는 날이 오면 더 기승을 부릴 사람들을 용인하는 말이다. 친일파, 러일파, 미국파 등등 그 파(派)를 부르는 일은 그 나라의 철학과 학문 등을 연구하는 학자들을 분류할 때 쓰는 말 정도 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러니 민족반역에 대한 과(過)가 크게 희석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사적인 자리에서 이러한 논점의 이야기를 자주 주장한다. 역사 교과서, 국어 교과서 등에 수록된 말을 보면 ‘친일파’라고 기록되어 있지 ‘민족반역자’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는 역사 인식을 아주 잘못 이해하고 나라의 주권에 대한 소중함을 모르는 사람들이 ‘통합과 포용’이라는 말을 앞세우기 위한 자기부정의 역사관이 아닐까 생각한다. ‘민족반역자’라는 말이 이념적이고 투쟁적인 말이라고도 말할 것이다. 투쟁이라는 말은 싸워 이기거나 극복해 내는 말이지 이념적으로 해석하여 쓰는 말이 아니다. 사회적으로 많은 단체에서 투쟁이라는 말을 사용하다 보니 투쟁이라는 낱말이 부정적 의미가 너무나 깊게 우리 사회에 뿌리내려 있다. 투쟁은 사람이 나서 죽을 때까지 목숨을 걸고 지켜가는 삶을 통용하는 말이다.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나는 온 몸에 햇살을 받고, /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 //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 한 자국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가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 너는 삼단 같은 머리털을 감었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 혼자라도 가쁘게 나가자. / 마른 논에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 나비, 제비야, 까불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을에도 인사를 해야지. /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도 보고 싶다. //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 /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 셈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우습다, 답을 하려무나. // 나는 온 몸에 풋내를 띠고, /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이상화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갯 전문
나는 많은 시인들의 시를 해설하면서 민족반역자들의 시를 인용할 때는 반듯이 일본을 찬양하고 찬양에 앞장섰던 일들을 먼저 이야기하고 시를 이야기한다. 내가 이상화 시인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갯라는 시의 전문을 인용하는 이유도 나라를 잃고 맞는 봄이 봄다운 봄일까라는 생각이다. 코로나19로 우리는 봄을 맞아 보았다. 그런데 그 봄이 봄이었던가를 뒤돌아보면 나라의 주권을 빼앗기고 맞는 봄은 코로나19라는 질병보다 수천 배, 수만 배 더 고통스러운 봄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부터라도 우리는 ‘친일파’라는 희석된 말을 쓰지 말고 ‘민족반역자’라는 말로 역사의 심판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민족반역자는 코로나19 보다 수만 배, 더 지독한 우리의 민족정신을 말살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민족반역자라고 불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