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년전 LA 폭동… 폭도 맞서 싸운 ‘루프톱 코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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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3월,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서 과속운전을 하던 흑인 남성 로드니 킹은 경찰의 정지명령을 무시하고 달아나다 붙잡혀 백인 경찰들에게 무자비하게 구타를 당한다.
이 장면은 TV를 통해 방송됐고, 경찰 4명이 기소됐다.
이듬해인 1992년 4월 29일, 흑인은 한 명도 없이 백인 10명을 포함한 12명의 배심원단이
경찰들에게 무죄 평결을 내리자 분노한 흑인들이 LA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흑백 인종 갈등으로 촉발된 LA 폭동은 한인사회로 그 불똥이 튀었다.
경찰은 백인 거주지역으로 가는 길을 원천 차단했고, 흑인밀집지역 가까이에는 한인타운이 있었다.
이전부터 흑인 지역 상권을 장악한 한인들에 대한 반감이 쌓여온 데다
미국 언론이 1년 전에 발생한 ‘두순자 사건’을 집중 조명하면서
흑인들의 분노가 한인들로 향했고 한인 상점은 방화와 약탈의 표적이 됐다.
두순자 사건은 슈퍼마켓을 운영하던 한인 여성 두 씨가 15세 흑인 소녀를
절도범으로 오인해 몸싸움을 벌이다 총을 쏴 숨지게 한 사건이다.
한인타운은 마치 전쟁터와 같았다. 유리창이 깨진 텅 빈 가게들이 화염에 휩싸여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여기저기서 총소리가 울렸다.
경찰은 백인 부유층들이 사는 지역만 보호하고 한인타운은 손을 놓아 무방비상태였다.
교민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들었다.
한국에서 군 복무 경력이 있는 예비군 출신들이 중심이 돼 자경단이 꾸려졌다.
옥상으로 올라가 보초를 서고 폭도들의 공격에 맞서 싸운 이들은
‘루프톱 코리안(Rooftop Korean·지붕 위의 한국인)’이라 불렸다.
무법천지로 변해버린 도시에 주 방위군이 투입되면서 5월 4일 비로소 폭동이 진압됐다.
한인 1명을 포함해 58명이 사망하고 2400여 명이 다쳤다.
한인타운은 잿더미가 됐고 상점 2800여 곳이 파괴됐다.
피해 규모는 약 3억5000만 달러로 전체 피해액 7억 달러의 절반에 달했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건너와 피땀 흘려 억척같이 일군 터전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제대로 보상도 받지 못한 교민들은 경제적 어려움뿐 아니라 큰 충격으로 깊은 상처를 입었다.
다인종·다문화사회에서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를 깨닫게 됐고.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정치력 신장을 위해 나서기 시작했다.
미국 최악의 인종 폭동으로 꼽히는 LA 폭동을 교민들은 ‘사이구(4·29)’라 부르며
아픈 역사를 잊지 않고 인종 간 연대와 화합을 위한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